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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쇼튜디오 쇼니입니다:)
저는 얼마 전 오키나와에 대해 알아보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는데요!
오키나와가 원래부터 일본 오키나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에요!
이미 알고 계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모르는 분들을 위해서! 혹은 제가 다시 기억하기 위해 기록 포스팅을 해보겠습니다 :)
오키나와가 옛 이름 류큐 왕국
- 3만 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던 작은 화산섬
- 13세기 전 후에 농경이 활발
- 북산 중산 남산이라는 세 나라로 분리되어 있었음 이 시대를 삼국시대(삼산 시대)라 불렀음
- 1429년 중산국의 쇼하시왕이 삼국(북산, 중산, 남산)을 통일하고 슈리 성을 수도로 정함
- 쇼하시왕은 류큐왕국 제1쇼씨 왕조의제 2대 국왕이자 초대 류큐 국왕
류큐 왕국의 역사 시작
- 류큐 왕국에 기여한 나라가 고려의 삼별초라는 연구 결과가 나옴
삼별초
몽골 침략기 때 고려의 무장 세력으로, 원래는 하나의 단일 단체가 아니었음
삼별초는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 세 개의 별초군을 합쳐 부르는 이름
고려에 쳐들어온 몰골에 맞서 끝까지 싸운 것으로 유명함
근거지를 옮겨가며 항쟁하다가 1273년 섬멸당한 것을 끝으로 역사에서 사라짐
흥미로운 사실
- 삼별초가 사라지자마자 오키나와에서 각지 세력이 구스쿠(류큐 왕국의 성, 요새)라는 큰 성을 건축해 초기 국가체제를 갖추기 시작했다는 점
- 그 대형 건축 기술이 대체 어디서 유입 됐냐는 물음에 삼별초 이동설이 제기
-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건 류큐의 성에서 출토된 고려 기와
고려 정부가 항복한 뒤에도 대몽골 항쟁을 이어간 삼별초
1271년 이후 여몽연합군에 패배했지만 이중 살아남은 이들이 류큐로 건너가 1273년에 고려 기와를 만들고 성을 건축했을 거라는 가정이 제기됨
- 슈리성에서 많이 출토된 기와에서는 "계유년고려와장초"라고 선명하게 새겨져 있음 (계유년에 고려기와 장인이 만들었다는 의미)
- 탄소연대를 측정해 보니 계유년의 시기는 1273년이 유력하다는 주장이 일본에서도 제기됨
- 오키나와에서 출토된 기와는 진도 용장산성에서 출토된 기와랑 제작 기법이 같다고 판명남
진도 용장산성의 기와는 진도에서 대몽항쟁을 벌인 삼별초가 만든 것
- 삼별초가 제주에서 궤멸 한 것이 아니라 일부는 류큐로 건너가 성 쌓는 기술인 축성술 등을 전파하며 류큐왕국 건국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고 있음
15세기 새 역사를 써 내려간 류큐왕국
- 류큐는 중국의 책봉군으로 2년에 1번 조공을 함
- 명나라 선덕제가 "류큐"라고 국호도 내려줌
- 조공의 대가로 명과의 무역 독점권 획득
- 명나라에서 물건을 사서 조선, 일본, 동남아에 수출하거나
- 여러 나라의 물건을 수입해 명나라에 수출하여
- 해상중개무역으로 부를 축적하며 독자적인 문화가 발전하고 전성기를 누림
류큐와 친했던 조선은 유구국, 류구국이라 불렀음
일본과 류큐
- 일본은 세력 싸움을 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류큐에 관심이 없었음
- 무력이나 국방력에 관심 없었던 류큐
- 1590년 일본을 통일시킨 도요토미 히데요기사 대륙 정벌에 눈을 돌림
도요토미가 사쓰마번(현재 가고시마)에 군역 15,000명분을 요구했지만, 전쟁을 치른 직후라 여력이 없던 사쓰마번(현재 가고시마)는 류큐에 군역 15,000명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음
- 명나라와 조선과 친하게 지내고 있던 류큐는 군역 거절
- 큐류가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요토미가 조선을 침략하려 한다고 전함
- 1592년 사쓰마번이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 먹일 식량 요구
- 거절
- 자존심 상한 싸쓰마번(현재 가고시마) 류큐 침략하려고 이를 감
이후 임진왜란에서 패배한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새 막부를 열게 됨
- 1609년 사쓰마번은 도쿠가와의 허락을 받아 류큐왕국 침공
- 약 100척의 함선에 3천여 명의 사무라이를 태우고 4월 1일 류큐 도착
- 전쟁 한 번 못해봤던 류큐는 저항도 못하고 짓밟힘
- 침략자들은 슈리성을 닷새만에 점령
- 국왕과 고위 관리 백여 명을 사쓰마번으로 끌고 감
- 사쓰마번(현재 가고시마)에 잡혀간 류큐의 충신들이 기름 솥에 던져지기도 함
- 결국 사쓰마의 속국임을 선언하고 2년 반 만에 류큐로 돌아갈 수 있었음
- 사쓰마번은 수리성에 감독관을 보내 내정 간섭하기 시작
침략한 진짜 이유
- 중국과의 무역 이익을 중간에 빼먹을 속셈이었음
- 청나라 황제가 류큐에 사절단을 보낼 때마다 일본의 지배 흔적은 감춤
- 청나라 말엽까지도 류큐가 예전부터 이중 속국이었던 사실을 몰랐음
- 이후 1693년 토카라지마 등 류큐 북부 5개 섬을 할양
- 현재 류큐 열도에 있는 북쪽 섬들이 오키나와현이 아니라 가고시마현에 속해있음
- 이렇게 류큐왕국은 일본과 중국을 동시에 섬기게 됨
- 1853년 시커먼 미국 군함 4척이 일본 도쿄에 나타나 개항을 요구
- 전통적으로 *쇄국정책 취하고 있던 일본 (*외국의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정책)
- 미군 함대의 위세에 눌려 애도막부는 결국 항구를 열게 되며
- 1854년 미일화친조약을 맺게 됨
- 이 과정에서 미국은 류큐의 항구도 개방하라고 요구
- 중국의 눈치를 보며 애매한 태도를 보이며 일본은 난감해함
- 류큐는 아주 멀리 떨어진 독립국이기 때문에 항구 개방권이 없다고 둘러댐
- 그러자 페리 제독이 흑선 함대를 몰고 직접 류큐 나하 앞바다에 정박
- 페리 제독과 미류화친조약을 체결 (이 체결은 엄연히 독립국 자격으로 국제 조약을 맺었다는 의미)
- 그 이후에도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와도 조약을 맺음
지켜보던 일본은 류큐를 독립국으로 인정한 걸까? NO!
- 1872년 일본은 류큐왕국을 일본의 류큐 번으로 편입시킴
- 류큐의 국왕을 일본 귀족과 같은 지위로 격하 시킴
- 더 이상 중국의 눈치를 보던 일본이 아님
- 서구 열강의 것을 미친 듯이 흡수하기 시작
서구 열강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유럽과 북미를 중심으로 한 국가들을 일컫는 말로, 이들 국가는 세계의 대부분의 영토를 강제적으로 지배
- 1875년 일본은 류큐에게 청나라의 연호도 쓰지 말고
- 청나라에 조공도 중단하며,
- 일본이 정한 형법을 쓸 것이고
- 일본 군대를 류큐에 주둔시킬 수 있다는 내용이 적힌 10개의 조항을 류큐 사람들에게 공표함 (류큐의 시스켐을 없애겠다는 의미이자 멸망시키겠다는 이야기)
- 류큐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킴
- 3명의 류큐 밀사는 당시 청나라 실세였던 이홍장을 몰래 찾아감
- 밀사들은 구해달라며 혈서까지 씀
- 청나라는 일본을 가만히 두면 대만, 조선, 청나라까지 눈독 들일 수 있겠다 싶어 고민함
- 그렇지만 멀리 있는 류큐를 살리기 위해 전쟁을 일으킬 수도 없는 노릇
- 청은 일본에 항의하는 말을 던져봤지만 씨알도 안 먹힘
- 더 세게 나가기로 한 일본은 류큐를 아예 먹여버리겠다고 다짐
- 결국 1879년 4월 4일 류큐왕국 마지막날이 됨
침략
- 일본은 500여 명의 병력을 류큐로 보내 슈리성을 무력으로 점령
- 1879년 일제에 강제 병합, 류큐왕국 멸망
- 류큐 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이 됨
- 이 날부터 일본인이 됨
- 이 소식은 퍼지고 퍼져 미국 18대 대통령 그랜트의 귀에 들어감
- 그랜트는 동북아시아의 모든 바닷길을 차지한 일본이 결국 아시아를 집어삼키려 할 것이다라고 말함
- 그랜트는 청나라로 건너가 이홍장을 설득
- 미국은 청나라에게 류큐 3분 안을 제안
3분 안
류큐의 북부는 일본이 관리, 남부는 청나라가 관리, 중부는 류큐왕국을 부활시켜 일본과 청나라가 함께 관리하자는 제안
- 이홍장은 류큐를 일본에 넘길 수는 없지만 막기엔 힘이 부침
- 그래서 그랜트는 직접 중재하기 위해 도쿄로 넘어가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 3분 안을 제시
- 일본은 2분 안으로 수정해서 제시
2분 안
중부와 북부는 일본이 지배, 남부는 청나라가 지배
- 1880년 청나라에 2분 안 제안이 도착했지만 이홍장은 도저히 서명할 수 없었음
- 동의하자니 본인 주장에 대한 명문이 사라지고
- 거부하자니 일본이 보복할까 두려워서
- 답변하지 않고 시간 끌었음
- 침묵의 시간이 흐르자 2분 안 제안은 청나라의 묵시적 승인으로 처리되어
- 류큐의 독립 기회 날아감
오키나와 전투
- 오키나와인(류큐인)들은 일본 본토와 차별 대우를 받으며 열등한 존재, 식민지 취급을 받으며 살아감
- 1942년 태평양 전쟁 속 일본은 사활을 걸고 미국에 맞서 싸움
- 오키나와 전투는 일본 땅에서 벌어진 유일한 지상전이었고 가장 치열한 전투
- 오키나와인(류큐인)들을 총알받이로 세움
- 주민들에게 폭탄을 채워 미군 쪽으로 밀기도 하며, 가장 가혹한 건 주민들에게 내려진 집단 ㅈㅅ명령
- 일본군에 강압에 의해 집단으로 목숨을 끊어야 했음
- 이 전쟁으로 전사한 미군은 약 12,000여 명 일본군 전사자는 약 65,000여 명
- 3개월간의 전투로 초토화된 오키나와
- 사망, 행방불명된 주민 수는 약 120,000만 명
- 일본군 사망자보다 학살당한 오키나와주민(류큐인) 수가 더 많았음
- 결국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하
- 1945년 일제 항복 (2차 세계대전이 끝남)
- 이후 오키나와는 일본에서 분리되어 미군정의 지배를 받음
-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이 기간을 지나는 동안 미국의 중요한 군사기지로 쓰임 (가데나 공군 기지)
- 혼란한 역사 속에서 오키나와인들의 정체성도 혼란해짐
- 1972년 미국이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
- 공식적으로 일본 국민이 됨
- 일본은 류큐인들의 정신을 개조하기 위해 류큐왕국의 민족성과 전통문화를 비문명적인 것으로 취급하며 말살함
- 독립 국가로 지낸 세월이 길었던 류큐는 일본 본토와는 문화부터 언어까지 차이가 큼
- 류큐어는 일본어와 문법 체계부터가 달라 타국어임
유엔에서는 오키나와 사람들을 원주민으로 인정하고 토지와 천연자원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라고 함
하지만 일본에서는 정부가 원주민으로 인식하는 나라는 북해도의 아이누족 뿐이라고 함
- 오키나와는 여전히 류큐의 흔적이 남아 있음
- 류큐인들의 독자적인 식문화와 낙천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음
2004년 미국 주간지인 타임에 100세까지 건강하게 살고 싶다면 오키나와를 배우라라고 쓰여있다고 함
장수 비결
1년 내내 쾌적한 날씨 (4계절이 있지만 1년의 절반이상 따뜻한 여름 날씨)
- 1월이면 일본에서 가장 먼저 벚꽃이 만개함
- 한 겨울에도 20도의 기온 유지
- 이러한 환경은 류큐인 특유의 긍정적이고 느긋한 청성을 만들었음
모아이 전통
- 5명~10명으로 구성된 운명 공동체 같은 모임
- 평생에 걸쳐 서로 궂은일을 돕고 삶을 공유하며 서로를 보살펴주면서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우정을 나누며 사회활동을 이어감
- 모아이를 통해 서로를 고립시키지 않고 건강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100세 전후 고령의 노인들에게도 행복과 기쁨을 줌
- 모아이와 같은 인간관계는 운동, 금연, 금주보다 더 중요한 수명 연장 수단이라고 함
-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 것은 뇌의 인지기능을 자극하고 치매를 예방하며, 건강을 오래오래 유지하게 만듦
- 낙천주의인 오키나와의 노인들은 자주 모여서 춤과 노래를 즐기며 스트레스를 누적하지 않음
식습관(하라하치부)
- 소식을 원칙으로 함
- 류큐의 전통음식은 항산성 식단으로 영양 균형이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음
- 100세 이상의 노인들은 날마다 7종 이상의 채소와 과일을 먹음
- 식단의 78%가 채식
- 기름기를 제거한 돼지고기 요리를 즐김
오키나와인들이 "누치구스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이 뜻은 음식이 생명에 영양을 공급하는 최고의 약이라는 의미임
하지만 오늘날의 오키나와는 현대적으로 많이 바뀌어 모아이 전통도 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요즘 세대들은 모국어인 류큐어를 거의 하지 못하게 됐어요
독특한 민족성, 역사, 문화, 전통을 가진 오키나와 류큐 사람들을 일본 정부가 선주민족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유감이다 - 유엔인권이원회-
유네스코는 오키나와 전통 언어인 류큐어를 2009년 소멸 위기 언어로 등재
우리에겐 여행하고 싶은 나라이겠지만,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 오키나와인 옛 류큐인들의 이야기
작성하면서도 많은 감정이 들게 하는 이야기였던 거 같아요.
인간의 욕심은 정말 끝이 없고 잔인하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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